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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의 방랑기

나의 폰 트랩 대령, 혹은 장조림

by 테오∞ 2017. 6. 16.

동생이 울었다_"장조림 맛이야"

  스페인의 코르도바. 테이블 너머에 앉은 동생이 갑자기 눈물을 글썽였다. 큰 맘먹고 트립어드바이저와 구글맵을 더듬어 찾아간 한 유명 레스토랑의 소꼬리찜을 앞에 둔 채였다. 벽을 가득 채운 (아마도 분명 유명인일)방문객들의 사진에 조금 쫄아 선뜻 포크를 들지 못하고 있던 나는 당황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동생은 여전히 훌쩍거리며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장조림 맛이야..."

  가난한 배낭여행객인 우리에게는 소꼬리찜'님'이라 할만 한 요리를 두고 장조림이라니. 그것도 할아버지의. 수염이 숭숭 난 동생의 울먹거리는 모습이 퍽 웃겼다. 그렇지만 나는 평소처럼 동생을 놀리지 못했다. 입을 열면 '쿨'하지 못하게 뭔가 울컥 튀어나와 멋쩍어질 것 같았다. 그리 춥지 않은 어느 겨울날이었다. 


   


폰 트랩 대령_사운드 오브 뮤직

  이미 고전의 반열에 들었지만, 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1965)"은 초등학생 때 배우는 '도레미 송'으로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낯익은 영화다. 오스트리아의 청명한 풍경을 배경으로 울려 퍼지는 앳된 줄리 앤드루스의 청아한 목소리와 귀에 쏙쏙 들어오는 유쾌한 가사의 매력적인 넘버들, 각기 다른 개성을 보여 주는 왁자지껄한 7남매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스토리라인 위에서 풋풋하게 펼쳐지는 사랑 이야기를 보여주는 "사운드 오브 뮤직". 이 영화는 내 단짝인 혜진이 "미션(1986)"과 더불어 무척 좋아하는 영화 중에 하나기도 하다. 혜진이의 짝꿍인 뇽은 태어나서 영화관에서 처음 봤던 영화가 대한극장인가 허리우드극장인가에 서 본 "사운드 오브 뮤직"이었다고 하니 이 영화가 우리 집 식구들에게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 영화인 것만은 확실하다. 나도 덩달아 미취학 아동기 때부터 비디오로 열심히 이 영화를 시청하며 쑥쑥 컸는데, 사랑스러운 마리아의 짝이자 7남매의 아버지인 폰 트랩 대령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ㅁ(1928~)이다.


  ㅁ은 혜진의 아버지이자 나의 외할아버지다. 폰 트랩 대령의 성격과는 미묘하게 다른 것이,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자기표현과 호불호가 확실한 양반이지만 내가 폰 트랩 대령을 볼 때마다 외할아버지를 떠올리는 것은 아마 그가 마리아를 만나기 전과 후의 폰 트랩 대령의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꼭 군인 출신이어서만은 아니다. 아이들을 사열시키는 엄격하고 무뚝뚝한 폰 트랩 대령과 음악을 사랑하고 즐겁게 노래하는 폰 트랩 대령의 모습 둘 다를 외할아버지는 모두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런 모습을 사랑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마냥 칠렐레 팔렐레 즐겁게가 삶의 모토였던 어린 내가 이 폰 트랩 대령과 함께 살게 되었을 때 부터였다. 


  새벽 5시면 칼 같이 일어나던 할아버지는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상관없이 운동화 끈을 매고 밖으로 나가 최소 30분 이상의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가 그렇게 철저하게 자기관리에 매진했던 것은 투표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혈혈단신 38선을 넘어와 나름 자수성가를 이뤄냈던 삶의 궤적 때문일까? 어쨌거나 자기관리에 철저했던 할아버지에게는 이와 더불어 어릴 때부터 전인교육을 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는데, 내가 초등학교에 막 적응했을 무렵 직장에 다시 나가기 시작한 혜진을 대신해 일주일에 사나흘을 우리 집에서 머물렀던 할아버지는 자신의 신념대로 나와 동생을 챙겨주었다. 다시 말해 나는 적어도 일주일에 사흘 이상을 어둑한 새벽에 일어나야 했다.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나는 수면 친화적 인간이고, 쌀쌀한 새벽 공기를 상쾌하게 느낀다기보다는 기분 나쁜 싸늘함으로 여긴다는 데 있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 혹은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라는 경구를 자주 애용하던 할아버지가 보기에 내 잠버릇은 거의 수면장애에 가까운 매우 불건전한 병이었고, 나를 깨우기 위해 정말 별의별 방법이 동원되곤 했다. 그중 하나였던 물 끼얹기가 실행될 때마다 나는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은 것 같은 억울함과 분노에 이를 갈며 어쩔 수 없이 축축한 이불에서 일어났다. 끈질기게 나를 깨우는 할아버지를 피해 옷장 속으로 대피해 이미 깨버린 꿈을 조금이라도 다시 이어 꾸려 애쓰기도 했다.


  여하튼 그런 나에게는 매우 불행하게도 우리 집 바로 뒤에는 632m 높이의 산이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나와 동생을 끌고 새벽 산행에 나서곤 했다. 물론 정상까지 오르는 일은 드물었다. 구↓구↓구↑구↑하는 멧비둘기 소리를 들으며(물론 그때는 멧비둘기인 줄 몰랐지만) 입구에서 계곡을 지나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 옆길로 빠지는 것이 우리의 코스였다. 그 길로 조금 올라가면 바위로 된 작은 공터가 나왔다. 앞이 탁 트여서  야트막한 시내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거기서 우리는 함께 국민체조나 할아버지의 창작 맨손체조를 했다. 만족할 만큼 체조를 한 할아버지는 산을 내려다보며 우렁우렁 하게 "산타루치아" 같은 유명 가곡이나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같은 거창한 찬송가들을 불렀고, 어린 나는 그게 굉장히 부끄러워 빨리 노래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곤 했다. 


  어떤 새벽에는 함께 자전거를 타고 산 대신 언덕 아래 동네 공원으로 향하기도 했다. 당연히 공원에서도 체조는 빠지지 않았지만 다행히 노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공원에 가는 게 적어도 산에 가는 것보다는 조금 좋았다. 언덕을 쏜살같이 내려가며 숨 막히는 바람을 맞는 것도 꽤 괜찮은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 비 오는 날 언덕에서 미끄러져 기어 톱니에 박힌 상처가 꽤 오랫동안 다리에 남았던 적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연고를 발라준 흉터는 이제 사라졌지만 할아버지와의 기억들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생각해보면 나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도, 언덕길을 오를 때는 안장에서 일어나 페달을 밟거나 길을 지그재그로 올라가라고 가르쳐준 사람도 할아버지였다. 수학 머리가 좋아진다며(?) 민화투 치는 법을 가르쳐준 것도, 주판 사용법을 가르쳐 준 것도, 이해가 느린 나에게 끈기 있게 바둑을 가르쳤던(적어도 시도는 했던)것도, 묵은 쌀을 볕에 말리고 밥물을 맞추는 법이나 재활용 쓰레기를 분류하는 법을 가르쳐 준 것도 할아버지였다. 그리고, 평생 잊지 못할 장조림을 만들어 준 것도. 


그래서 장조림

  할아버지는 그야말로 도전정신과 실험정신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외할머니가 살아계실 적에는 통 부엌 출입을 하신 적이 없다는 할아버지의 '완벽한 장조림 만들기 실험'은 내가 중학교에 갈 무렵까지 계속되었는데, 거기에 반강제적으로 참가하는 것 물론 나와 동생의 일이었다. 다종의 간장으로 만든 장조림을 테스트하는 것은 물론이고(할아버지는 퇴역 후 모 간장회사에서 일했다고 한다), 고기 부위를 바꿔보거나, 설탕을 넣거나, 참기름을 넣거나, 생강가루를 넣거나, 우유에 담가 핏물을 빼거나, 인스턴트 불고기 양념을 써보거나, 통마늘을 넣거나 하는 실험들이 이어졌다. 우리에게 불행했던 점은 할아버지가 결코 실패작을 버리는 일이 없었다는 점이다.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라서인지, 아니면 그냥 성격 때문인지 할아버지는 슈피겔만의『쥐』에 나오는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할아버지가 '실패한' 장조림을 음식물 쓰레기로 취급할 리 없었다. 할아버지 손에서 만들어진 모든 장조림은 성공이냐 실패를 떠나 말 그대로 나와 동생의 피와 살이 되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묵은지와 장조림을 우유와 함께 밥과 비빈 정체불명의 요리였다. 글을 읽는 이의 비위가 상했다면 미안하다. 여하간 이미 평범한 장조림에서 한참 벗어난 괴식이었지만 할아버지가 보기에는 그만한 보양식도 없었을 터였다. 우유에, 고기에, 밥에, 김치로 비타민까지 더 했으니. 쨌든 그 이후 나는 국물에 뽀얗게 굳은 기름이 뜬 냉장고 속의 장조림을 보기만 하면 속이 메슥거렸다. 


  동생과 내가 훌쩍 커서 할아버지의 보살핌이 필요 없어진 뒤에도 우리 집 냉장고 한 귀퉁이에는 항상 고등어가 아니라 장조림병이 놓여있었다. 할아버지가 종종 손수 만든 장조림을 들고 외갓집에서 전철로 2시간 거리의 우리 집을 찾아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우리는 할아버지의 장조림을 먹지 못 했다. 지하철을 타러 갈 때도 마을버스를 타기보다는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가기를 좋아하던 할아버지, 평생 칼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할 것 같던 할아버지가 이제 몇 걸음 뗄 때조차 다른 이의 부축이 필요하게 된 이후로 쭉. 


  그리고 어느 겨울, 우리는 그렇게 한국에서 떨어진 이국 땅에서, 우리는 그 지긋지긋한 장조림과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소꼬리찜을 먹었다. 포크를 가져다 댈수록 점점 짜지는 소꼬리찜을 먹었다. 장조림이 사람을 울리다니. 웃기는 일이다.     

 

 할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요양병원에 입원한 지 거의 한 달이 다 돼간다. 병태와 나는 시간이 통 나지 않아 주말이 되어서야 겨우 처음으로 할아버지를 찾아갔다. 감기 기운이 있는지 혜진의 손을 꽉 움켜잡은 할아버지 손이 뜨끈뜨끈했다. 원래 좋지 않던 귀는 이제는 보청기를 껴도 들리지 않아서 굳이 입으로 대화할 필요가 없기도 했지만. 


  나는 어쨌거나 입을 열지 못했다. 입을 열면 '쿨'하지 못하게 뭔가 울컥 튀어나올 것 같았다. 뭔가 튀어나왔다면 아마 그건 분명 장조림이었을 것이다. 

10/2016


+

  병태 면회를 마치고 할아버지를 보러 일산으로 갔다. 도착한 것은 아직 사방이 밝은 이른 저녁이었다. 일찌감치 저녁식사를 했다는 할아버지는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다(주무시고 있었다가 맞는 표현이겠지만 뭐). 혜진이는 할아버지를 깨워보려고 노력했다. 나는 그런 엄마 옆에서 가만히 할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여전히 뜨끈한 손이었다. 한 손에 들어오는 손목을 쥐어보았다. 대강대강 헐겁게 비닐 포장한 물건처럼 마른 거죽이 뼈에서 헛돌았다. 이게 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보는 순간일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할아버지가 몇 년전에 쓴 자서전을 편집해 멋들어진 책을 만들겠다고 해 놓고 아직도 편집을 마치지 않은 내 게으름이 마음을 불편하게했다. 동시에 나의 게으름을 항상 못마땅해 하던 할아버지와, 그런 할아버지의 잔소리들을 떠올리니 조금 웃음이 나왔다. 눈이 축축해진 게 느껴졌다. 입술을 앙다물고 입꼬리를 당겼다. 시시콜콜하게 계속 잔소리를 하며 나를 '교정'하려고 드는 사람은 아마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계속 할아버지의 손과 머리를 쓰다듬다가 병원을 나섰다. 나의 폰트랩 대령.

  지금 카페에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중이다. 마침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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