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4/2018
막 일요일로 넘어간 새벽. 타자를 친다. 니카라과 상황은 안전 국면에 접어 들었다. 적어도 에스텔리는 완전히 일상으로 돌아온 듯 하다. 피스콥과 캐나다 봉사단원들은 며칠 전 다 니카라과를 떴는데, 주변에서 "ㅉㅉ 여윾시 그링고('백인 양키'의 순화 표현)들"하는 반응을 좀 들었다. 거리는 평온하지만 주말~노동절의 크고 작은 시위에 정부가 다시 폭력 진압을 시도한다면 다시 충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하간 초중등학교들도 임시 휴교가 끝났고. 우리 학교는 아직 쉬는 중이다. 본캠의 방침에 따라 교직원들은 다음 주 목요일부터 출근하고 7일부터 정상 수업을 재개한다. 이거야 원, 세마나산타 휴가가 끝났을 때도 너무 오래 쉬어 그런지 수업할 때 에스빠뇰이 잘 안 튀어 나왔는데, 이번에는 후유증이 더 심할 것 같다. 이번 상황을 겪으며 거의 손을 놓고 있던 어학공부를 더 의식적으로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거의 일년차인데 아직도 뉴스나 티비 발표를 잘 이해 못해?하며 진심으로 의아해하던 병태 목소리에 자존심이 상한 것도 있고. 실질적으로도 필요하기도 하고.
사무소에서 아시면 기겁하실텐데(죄송), 사실 지난 월요일 에스텔리에서 있었던 희생자 추모 행진 겸 시위를 보러 나갔다. 모자를 눌러쓰고, 중앙공원을 지나 일요일 광장으로 갔다. '공식적'으로는 비타민을 사러 나간 거라 한 손에는 비닐봉지를 털렁거리면서 돌아다녔다. 메인 거리의 가게들은 일찌감치 셔터를 내리고 있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려는 듯. 길가에 휘갈겨진 글씨들 사진을 찍으며 슬렁슬렁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본 뒤 팔리 근처에 자리 잡았다. 내가 받은 정보로는 남쪽 병원 근처에서 2시에 집회, 3시에 행진 시작. 거진 3시 40분 쯤 멀리서 파랗고 하얀 물결이 보였다. 깃발을 든 사람들의 무리. 맨 앞에는 페북 생중계를 하는 듯 카메라를 들고 뒷걸음질 치는 학생 둘(복면을 했는데 아무래도 하나는 작년 국제처 근로장학생이었던 H인 것 같았다). 그 뒤로(앞으로?) 죽은 아들의 사진을 든 어머니. 그 뒤를 따르는 학생들 무리. 그리고 일반 시민들. 열사병 방지를 위해서일까, 최루탄 때문일까 주변 사람들에게 물봉지를 던지는 의료팀을 태운 작은 트럭 두 대. 국기를 몸에 휘감던가 얼굴에 그려 넣은 오토바이부대. 생각했던 것보다 어마무지한 규모였다. "다니엘이나 소모사나 똑같다" "국민의 죽음 (어쩌구.)"하는 구호들을 외쳐대는 어린 학생들. 나는 서너 발자국 떨어진 보도에서 지나쳐가는 행렬을 보았다. 보기만 했다. 와중에 아는 얼굴들도 두엇 마주쳤다. J는 나중에 왓츠앱으로 나를 봤었다는 인사를 전했다. 살사 동호회 사람들을 보기도 했다. 행진을 보고, 슬쩍 먼저 돌아가 판아메리카나 하이웨이 쪽에서 다시 한 번 행진을 보고 집으로 들어왔다. 역시 나는 이방인일 뿐이라는 생각. 기분이 이상했다.
지난 주는 퍽 더워서 방에서는 거의 타일 바닥에 붙어 지냈다. 슬슬 우기가 시작 되어야 할 땐데 이상하다, 싶었는데 엊그제인가 사방에 먼지냄새가 확 나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남아있던 설격려품 짬뽕라면과 깻잎을 뜯어 이른 저녁을 먹었다. 밥까지 잘 말아먹고 빗소리를 들으면서 시나몬 한 개를 꽂아 넣은 코코아도 마셨다. 추운 날 방 안 이불 속에서 귤 까먹는 기분. 여튼 오늘 오후 쯤 디아나 생일선물 만들 재료도 살겸 단 것도 살겸 마실 다녀올 때도 또 한 바탕 비가 왔다. 그나저나 최근 최애 조합은 짭텔라(누텔라 350g이랑 가격이 비슷하나 750g인가 그래서 집)+체다치즈+식빵. 최소한의 양심으로 골라든 다이어트용 잡곡 식빵에 초코스프레드를 치덕치덕 바르면서 이게 바로 뻔뻔함의 결정체가 아닌가라고 잠깐 생각(만) 했다. 자키 아줌마 생일에 찍힌 사진을 보니 턱이 접히기 시작한게 보인다...!
수요일이 아줌마 생일이었다. 당일에는 에밀리가 요리를 할 것 같아서 나는 전날 미리 축하로 탕수육을 만들었다. 동기 선생님이 유까 탕수육을 성공했다는 얘기를 얼핏 들었던 기억이 나 열심히 인터넷을 뒤져 레시피를 찾았다. 당당하게 오늘 점심은 내가 하겠다고 얘기하고, 재료를 사왔다. 제일 먼저 강판에 잘게 간 유까에 물을 붓고 전분을 가라앉혔다. 어린애 팔만한 유까 두 덩이를 사왔는데 전분이 너무 조금 나와 당황. 전분에 적당히 밀가루를 섞어 튀김반죽을 만들고 소스는 그냥 밀가루 물로 꾸덕하게 했다. 거의 4리브라를 튀기느라 시간이 너무 오래걸려서 모두 3시가 지나서야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튀김은 괜찮았는데, 노란 레몬(limonero)이 없어 넣은 초록 레몬 때문에 소스에서 엄청 쓴 맛이 났다. ㅁ;리ㅏㅓㄴㅁㅇ리;ㅏ더게ㅐㅓㅏ링ㄴ리ㅏ!! 다들 먹을만 하다고 해줬다. 예의바른 사람들.
언젠가 설욕할 것을 다짐하며, 수요일 당일에는 율리에게 케잌 따로 준비하는 사람 없으면 내가 하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처음에는 에밀리가 산다고 나에게는 음료수를 사는 미션이 주어졌는데, 에밀리랑 나랑 역할을 바꾸기로 하고 케잌을 사러 나갔다. 율리가 추천한 대성당 근처 케익 맛집은 문을 닫아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 결국 도마뱀 카페(원래 이름은 bourbon. 왠지 자꾸 버번이 아니라 불어식으로 부르봉으로 부르게 됨)에서 다행히 하나 남은 홀케잌을 샀다. 엉겹결에 한국어로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고, 에밀리와 벨렌이 준비한 아로스 치노와 바베큐 소스 닭튀김+마늘빵으로 저녁도 맛있게 먹었다. (케잌은 망고 졸임을 위에 얹은 치즈무스 케잌이었는데, 많이 달지 않아서 디아나와 에텔은 별로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음)
생각해보니 오늘이 29일이다. 디아나 생일! 으아 우레탄줄 있는 줄 알고 비즈하고 참만 샀는데 어쩐다. 일요일이라 가게들도 다 닫았을 텐데
'테오의 방랑기 > 아디오스, 니카라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테오의 교실] 내가 여기 있는 이유 (1) | 2018.05.05 |
---|---|
23일 (1) | 2018.04.23 |
에스텔리 193일 차 / 니카라과 249일 차: 시위 (2) | 2018.04.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