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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의 방랑기/오막살이

오막살이 #1. 어쩌다 반독립

by 테오∞ 2022. 3. 13.

  병태 덕에 어쩌다가 반독립을 하게 되었다. 독립도 아니고 반독립이라니? 큰 짐들은 다 본가에 두고 가기도 하거니와 일주일에 사나흘 정도, 최장 2년만 나가 있으려고 하니 완전 독립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까닭이다. 하여간 나의 반독립지는 반지하다. 좀 더 말하자면, 수도권의 1.5 룸 반지하 방이다. 옆집에는 할머니 한 분이 사신다고 하고, 위층에는 집주인 할아버지 가족, 위에는 그 아들 가족이 산다. 월요일에 집 보고, 수요일에 계약하고, 그다음 주에 이사 가는 일정이니 신중한 이들이 보면 아마 혀를 찰 것이다.

  집을 구할 때 조건은 세 가지였다. 일터와 가까울 것, 대출 없이 빌릴 수 있는 전세집일 것, 부엌과 방이 분리되어 있을 것. 코로나와 함께한 2년 동안 간간이 출근했던 일터는 본가에서 편도 1시간 40분. 아침 전철을 탈 때마다 옆사람과 살을 부비면 '코로나 안 걸리는 게 더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도 상반기에는 재택을 중심으로 일할 것 같지만, 그래도 일단 일터와 가까운 곳을 찾고 싶었다.

  수도권 전세 구하기가 어렵다지만 여태껏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서울에서 독립 욕심이 없는 캥거루족으로 살다보면 집값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해진다. 그러다가 막상 집을 구하려고 해 보니 상전벽해가 따로 없었다. 10년 전 아버지와 싸우고 홧김에 알아보았던 서울 전셋집(결국 이사 나가지는 않았지만)은 분명 6천만 원 언저리였었는데 그 사이 집값은 오르고 또 올랐다. 일터 근처에서 예산 1억 2천만 원으로 찾을 수 있었던 전셋집은 세 곳뿐이었다. 나는 동생과 함께 집을 보러 갔다.

  첫 번째 집은 전세 5천의 반지하. 일단 골목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가로등이 없었다. 겁 많은 나는 일단 여기서 마이너스 점수를 매겼다. 작은 철문에 위아래 불투명 유리를 단 현관문도 아웃. 문에는 이전 세입자가 붙여둔 듯한 뽁뽁이까지 있었다. 방바닥보다 높게 올린, 역한 냄새가 나는 화장실은 화룡점정이었다. 화장실 창문도 없었다. 내가 떨떠름해하자 부동산 소장님은 근처의 다른 집을 보러가자고 권했다.

  두 번째 집은 전세 7천 500의 반지하. 버스가 다니는 도로에서 아주 가깝고 길이 먼저 본 집보다는 좀 밝았다. 바로 맞은편에 작은 마트가 있었다. 작은 철문을 열고 세 계단 정도 내려가면 문 두 개가 나란히 있는데, 내가 본 집은 입구에서 좀 더 먼 끝집이었다(겁이 많은 나는 또 소장님에게 옆집에는 누가 사는지 물어봤다. 할머니 한 분이 사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심).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스크를 뚫고 반지하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났다. 창문도 작은 편이라 오전인데도 등을 켜기 전에는 어두웠다. 그래도 도배며 샷시, 주방과 화장실까지 새로 시공해서 깔끔했다. 물도 잘 내려갔다. 1.5룸이라지만 부엌 겸 거실 공간이 넓은 것도 마음에 들었다.
  '어차피 밤에 잠만 자고 쉬는 날에는 본가에 갈 텐데 어두워도 상관없지 않을까?'

  집 볼 때 집이 마음에 든 티를 내면 안 된다고 어디서 주워 들은 것이 있어서 덤덤하게 다른 집은 없냐고 물었다. 동생 차를 타고 골목골목을 돌아 도착한 곳은 야트막한 언덕에 빌라가 촘촘하게 늘어 선 빌라촌. 우리가 본 빌라는 길의 맨 끝에 있는 건물이라 뒤쪽으로는 야산인지 공원인지가 있었다. 한 층에 세 세대가 있는 빌라의 5층까지 열심히 올라가서 문을 열었다. 이곳은 투룸에 9000. 베란다까지 딸려있었다. 창이 커서 흐린 날인데도 집 안이 아주 밝았다. 여기까지는 완벽했다. 문제는 상태가 매우 좋지 않은 곰팡이 낀 벽지와 장판이었다. 좁고 더러울 뿐만아니라 창문까지 없는 화장실도 마음에 걸렸다. 신발장의 유리는 크게 깨져있었다. 나는 셀프 인테리어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동생은 다른 의견이었다.
  "완전 독립해서 계속 살 것도 아니잖아? 굳이 돈이랑 품 들여서 고치고 이사할만한 가치가 있을까?"
  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 집은 앞서 본 두 집과는 달리 일터나 구시가지에서 다소 떨어져 있는 편이었다. 편의시설들과의 거리도 멀었다.
  "다른 데도 좀 보고 올게요." 
  우리는 두 번째 부동산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예산을 듣고 소개해준 매물들의 설명이 뭔가 익숙했다. 딱 방금 보고 온 그 세 집이었다. 심지어 상태가 안 좋았던 마지막 집은 부동산 어플에는 굉장히 멀끔한 사진으로 올라와 있었다.
그 사이 첫번째 부동산 소장님은 나에게 급하게 전화를 걸어 다른 부동산에서 그 집들을 보겠다고 한다고 전했다. 나는 뻘쭘하게 웃었다.
  "그거 저희예요."
  진짜 제대로 된 독립을 하는 거였다면 좀 더 찾아보고 따져보고 골랐겠지만, 그 정도의 절박함은 없었다. 나는 두 번째 집을 계약하기로 했다. 주 3~4회 내 세컨 하우스이자 베이스캠프가 될 곳은 전세 7천500에 수도세와 정화조를 합쳐서 월 2만 원, 그 외 공과금은 별도로 내야 하는 반지하가 되었다. 인터넷도 새로 설치해야 한다고 하니 뭔가 해외에서 좌충우돌했던 날들이 생각난다. 왕초보 스페인어로 2년을 버텼는데, 이곳은 최소한 말은 통하는 한국이다.

씨 없는 수박 김대중, 3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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