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2/2017
나는 내가 불꽃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다른 날 같으면 해가 지자마자 인적이 뜸해지는 에스뗄리의 거리가 자정이 넘어서도 소란하다. 펑펑 소리가 날 때마다 가슴이 덜컹 덜컹한다. 날짜가 바뀌었으니 오늘은 12월 25일. 예수가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왔다는 나비닫이다. 애어른 할 것 없이 집 앞 골목에 나와 크고 작은 불꽃놀이를 한다. 하숙집 가족들도 다들 대문 앞에 모였다. 화약 냄새가 매캐하다.
아침에 대청소를 하고 작업을 좀 하고, 왓츠앱으로 온 축하메세지에 답장을 보내고, 질세라 크리스마스 이미지를 열심히 전송했다. 연휴 중에 Miraflor미라플로르에 갈 까 말 까 계속 고민하면서 에어비앤비 사이트를 검색했다. 미라플로르는 에스뗄리 주에 있는 자연보호 구역 중 하나다. 에스뗄리 시에서는 약 1시간 30분~2시간 정도 떨어져 있다. 뜨거운 샤워를 할 수 있는 숙소는 식사 포함 하루에 30달러 선. 절대적으로는 싸지만 평균월급이 200달러인 이곳에서는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산이 아니라 호수나 바다였으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예약했겠지만, 나는 원래 하이킹이며 산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고심하다가 혹시 갈 생각이 들면 당일 치기로 다녀오기로 결정. 점심으로 창파이나를 세 그릇(+셀 수 없는 또르띠아)이나 먹고 또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냈다. 6시에는 저녁 예배에 갔다. 한 학생이 선물로 준, 목둘레에 전통 자수가 놓인 하얀 셔츠를 입었다. 돌아올 때는 다같이 훌리오(카티의 친오빠이자 막 1살 된, 볼따구가 통통한 헤네시의 아빠. 태권도를 배운 적이 있어서 숫자 세기와 차렷 준비 경례 등을 말할 수 있음)의 차에 탔다. 달을 볼 때마다 헤네시는 아야!(저기!)하면서 흥분했다.
교회 다녀와서 방에 올라와 있는 데 아줌마가 11시 30분에 저녁을 먹을 건데 괜찮냐고 물어본다. 전통이냐고 물어봤다. 그렇다고 해서 그럼 기다리겠다고 얘기했다. 막간을 이용해 A쌤에게 전화를 드렸다. 기관 직원 집에 초대 받으셨는데, 그 집에서도 돼지를 잡았다고 한다. 아무래도 우리집에서 구정마다 홍어를 준비하는 거랑 비슷한 느낌인 것 같다. 연휴를 맞아 귀한 음식을 나눠먹는 거지.
11시가 지나고, 먼저 잠자리에 든 할머니를 빼고 모두 모여 식사를 했다. 이 집을 거쳐간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이 선물하고 간 여러 종류의 술병도 식탁에 올랐다. 난 컨디션이 영 아니라서 안 마셨다. 항상 나오는 질문: 한국에서도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니? 등등. 수업 끝나고 발화량이 적어졌다가 갑자기 말하려니까 또 바보말이 되버렸지만 그래도 주섬주섬 설명했다. 그나저나, 니카라과에서는(하숙집 식구들은?) 보통 선물교환을 31일, 한 해의 마지막 날에 한다고 한다. 그래도 훌리오네며 율리며 할아버지할머니가 새벽 일찍 다른 친척집에 간다고 해서 준비한 선물을 미리 꺼냈다. 별 거 아닌 선물이라서 좀 부끄러웠지만, 포장을 열심히 했다는 데 의의를 뒀다.
설거지를 하고, 다같이 대문 베란다 의자에 앉아서 폭죽을 구경했다. 큰 소리가 날 때마다 움찔움찍하는 나를 보고 다들 웃는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지만 나는 영 불안하다. 폭죽 안전사고 기사를 봐서 더 그런지도 모른다. 하여간 31일에는 더 대단하다고 한다. 어휴. 애들이 들고있는 폭죽에서 멀찍이 떨어져 앉아 멀뚱멀뚱 보고 있으니 율리가 가족들 생각하냐고 묻는다. 리액션 강박이라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는데 사실 아무 생각도 안 하고 멍 때리고 있었다. 아줌마가 옆에서 그래도 여럿이 어울려 보내니 좋지 않냐고 묻는다. 그건 맞는 말이다. 또 끄덕끄덕. 아줌마는 스페인에서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내는 아들 얘기를 하면서 울적해했다. 보통 가족과 함께하는 명절에 혼자 있으려면 기분이 좀 그렇기는 하겠다. 근데 막상 나는 괜찮다. 허구헌날 연락해서 그런가. 게다가 구정을 생각하면 여전히 진절머리가 난다. 탈출에 성공해서 다행이라는 기분+혼자 손님 치를 혜진을 생각하니 좀 미안한 기분의 짬뽕.
25/12/2017
지금은 오후 4시 50분경. 해가 슬슬 질 기미를 보인다. 낮에는 비가 잠깐 왔다. 눈은 없지만 나에게는 충분히 쌀쌀한 크리스마스였다. 목은 괜찮아지고 있다. 체감 상 막 붓기 시작할 때가 제일 싫은데, 일찌감치 터진 것 같다. 여튼 근래 술을 종종 먹고 손발 씻기도 게을리해서 면역력이 떨어진 것 같다는 생각에 양심 상 올해가 가기 전에라도 꾸준히 운동하기로 했다.오전에 약간의 스트레칭+플랭크2분으로 운동 흉내나마냈다. 학교에 갈 때는 매일 한 시간 정도는 자전거를 탔는데, 쭉 쉬어서 그런가 몸이 늘어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먹는 양은 늘고 있지. 어휴. 살사 수업이 빨리 열렸으면 좋겠는데 영 열릴 기미가 없다.
해가 가자마자 활동물품신청서를 제출하려고 이런 저런 검색을 하고 견적을 돌리는데, 막상 내가 사고 싶은 한국문학 스페인 번역본들은 한국 쇼핑몰에서도 구할 수가 없다. 외국 쇼핑몰에서는 한 권에 40달러가 넘어가는 미친 가격에 판매중이고. 흠....
오늘의 비생산적인 일: 넷플에서 섀도우헌터 보는 중.. 최소한의 양심으로 에스파뇰 더빙 버전으로 틀어놓음. 아 사춘기 감성 완연하다. 약간 몸을 꼬면서 보게 됨.
생산적인 일: 해비타트 니카라과 홈페이지 찾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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