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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의 코이카/아디오스, 니카라과

5월 15일. 수도 대피

by 테오∞ 2018. 5. 16.

15.05.2018

  밤이다. 방금 전까지 비가 엄청나게 쏟아붓더니 곧 잠잠해졌다. 도로 상황 악화로 고생한 후이갈파 단원 선생님들 세 분을 마지막으로 전 단원이 수도에 모였다. 수도 대피라고 하지만, 대피라는 어감에 어울리지게 에어콘이 빵빵한 마나과 7층(무려) 호텔방에서 타자를 친다. 

  어제, 성실한 내일을 다짐하며 글을 싸고 난 뒤 9시 15분 쯤 사무소에서 카톡이 왔다. 비상대피 안내. 마타갈파 선생님들을 태운 차가 아침 9시 30분에 우리 집 앞에 도착한다고 했다. 파티오 정리 중이던 산토 아저씨한테 내일 마나과에 간다고 하니 도로가 다 막히고 버스도 없는데 어떻게 가냐고 걱정했다. 사무소 차로 간다고 설명하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계단을 올라가다 살짝 삐끗했다. 멍한게 뭔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괜히 왔다갔다하면서 정줄을 놓고 있다가 일단 옷장에 걸린 옷을 죄다 바닥에 쏟아 놓기 시작했다. 서랍이며 선반에 두었던 물건들도 죄다 내려 놓았다. 일곱 달 동안 에스텔리에서 보낸 시간 많큼 자잘하게 쌓인 물건들이 넘쳐났다. 뭘, 어디에 얼마나 챙겨야하나, 생각하다 동기 선생님들의 조언대로 코이카 배낭과 이민가방 하나에 짐을 꾸리기로 마음먹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빨래를 미리 해 놓을 걸. 퀴퀴한 빨래 한 봉다리를 가방에 쑤셔 넣으며 생각했다. 잠깐 짬을 내 지인들에게도 메시지를 돌렸다. 혹시 돌아 오지 못하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고 가는 짐들 중 하숙집 식구들이 쓸 만한 물건들을 따로 모아놓고, 나머지는 모두 상자와 코이카 이민가방에 담았다. 짐을 문가에 옮겨두고, 방을 한 번 쓸고 재활용품 쓰레기도 분류하니 네시 반 쯤이었다.

  잠깐 눈을 붙였다 해가 뜰 때 일어나 씼었다. 차량은 9시 반에 도착한다고 했지만, 학교에 두고 온 영수증 원본 서류를 챙겨와야 했기 때문에 카티의 바나나빵 하나를 입에 쑤셔넣고 집을 나섰다. 하숙집 가족들에게는 다녀오겠다는 문자를 남겨 두었다. 아넥사 앞에서 택시를 타고 학교로 갔다. 다행스럽게도 정문이 열려 있었다. 사무실에 가서 게시판을 정리하고, 책상 위아래를 정리하고, 학생들 주려고 챙겨 놓았던 과자와 커피 몇 개를 나누어 다른 선생님들 책상에 올려 놓고, 언젠가 후교수에게 주려고 리본을 묶어놓았던 명함집과 자켈린을 위한 동전지갑을 서랍에 잘 넣어 놓았다. 쓰레기를 왕창 버리고. 문제의 서류도 챙겨 학교를 나왔다. 택시가 보이지 않아 로자리오 앞에서 한참 기다리다 버스를 탔다. 버스는 등교하는 오전반 초중고생들로 가득했다. 아주 평범한 아침이었다. 

  짐을 끌어 안고 정류장에서 집으로 걸어 오는데, 집 앞에 서 있는 미니 밴이 보였다. 내 차구나. 직감했다. 아침 7시였다. 사전 연락을 받지 못했지만, 대충 보아하니 일정이 변경되어 에스텔리를 먼저 방문한 것 같았다. 어어어어? 하면서 방으로 뛰어 올라가 배낭과 서바이벌 키트를 짊어졌다. 아저씨가 큰 가방을 옮겨 주었다. 너무 정신 없이, 사진 한 장 찍지 못하고 바닦을 닦는 아줌마, 출근 준비하는 율리, 이를 닦는 에밀리, 아저씨와 포옹만했다. 디아나와 에스텔에게는 인사도 못했다. 그나마 미리 갈 채비를 해놓고 30일 어머니의 날에 아줌마 줄 선물도 예쁘게 준비해 놓아 다행이었다. 아저씨는 차량 번호판 사진을 찍었다. 괜히 울컥했다.

  마타갈파 가는 고속도로가 통제 중이라 꼬불꼬불한 산길을 돌고 돌았다. 센치해질 틈도 없이, 거의 기절한 채로 실려 갔다. 꿈도 없이 잤다. 마타갈파 선생님 네 분을 태우고 차는 다시 출발했다. 두 시 쯤 마나과에 도착했다. 원래 유숙소로 사용하던 호텔이 시위 메카 중 하나인 우까(UCA) 바로 근처인지라, 안전을 위해 사무소 근처 호텔에 짐을 풀었다. 바로 마실로 이동해 먼저 도착해 식사를 마친 레온, 마사야, 그라나다, (당연히 마나과도) 선생님들, 과장님들과 만났다. 과장님들은 회의가 있어 바로 떠나시고, 부대찌개와 오뎅탕으로 배를 채웠다. 밥을 두 공기 비웠다.

  다시 밴을 타고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혜진에게 전화했다. 살도도 없고, 아침에 급히 움직이느라 경황이 없어 출발 도착 연락이 늦었다. 예상은 했다만, 엄마는 엉엉 울었다. 아이고. 통화를 마치고 푹식푹신한 침대에서 씻지도 않고 기절했다. 여섯시 반쯤 일어나 과장님이 보내주셨다는 보급품 라면으로 저녁을 먹었다. 내일 아침 대사관으로 가서 대사님과 대충 현 상황에 대한 얘기를 나눌거라는(아마도, 통보 받을 거라는) 공지를 받았다. 오늘은 마따갈파에서 심한 충돌이 있었다. 로레나 쌤이 영상을 보여주었다. 총소리를 배경음으로, 젊은이들이 쓰러진 사람들을 옮겼다. 큼지막한 간판을 바리케이트 삼아 질질 끌면서. 북부팀 선생님들과 로비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후이갈파 선생님들과 짧은 인사를 나누고 방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10시 35분. 이제 빨래를 하려고 한다. 빨래가 마를 시간 정도는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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