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05 온두라스 56일차
방금 전까지 약간 세상 하직하고 싶은 기분이였는데 뜨거운 물로 씻고 나니 좀 나아졌다. 온두라스의 좋은 점: 뜨거운 물 샤워 가능. 니카에도 순간온수기는 있지만, 하숙집 애기들도 다 찬물로 씻는 마당에 따로 요구하기가 뭐해서 그냥 살았었다. 생각해보면 용케 버텼다 싶다. 그 추운 에스텔리에서.
생각해보면 동네 영화관의 유무나 식재료 구하기 같은 사치스러운 문제를 뺀다면 이곳에서의 생활이 훨씬 낫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 한 명 없는 동네에서 도보 30분 거리의 학교를 아침 점심 저녁으로 왕복 두 차례씩 걸어다니고, 새벽에 일어나 찬물로 샤워를 하고, 평일에는 9시에 끝나는 야간 수업을 하고, 주말에는 또 주말 수업을 하고... 이제 기관까지는 걸어서 6분이면 충분히 도착하고, 본인이 원하는 식생활을 마음껏 실천할 수 있고, 바로 주변에 한국어로 대화할 사람들도 살고 있다. 그런데도 이전의 생활이 자주 생각나는 것은 왜 그럴까. 아직 이곳에 정을 붙이지 못해서일까. 최소한의 사회주의스러움이 보였던 니카와 달리 그냥 미국의 하위 호환같아서 그런걸까. 하여간 이 새로운 일상에 좀 엉덩이를 붙이고 지내보자 싶으면 자꾸 일이 생긴다. 오자마자 독립기념일 휴가에, 세계 관광의 날을 기념한 호텔관광학과 주간에, 일주일을 꼬박 쉰 (우리 학교는 수목금만 쉬긴 했어도)세마나 모라사니카에. 이제 내일모레는 안전집합훈련으로 수도에 간다. 자꾸 욕을 되까리게 되는 건 머리가 계속 아픈 탓이다. 장티푸스.
엊그제 토요일 일반 코스 과정을 시작했다. 2개반, 인터넷 신청으로는 65명이 넘게 신청해 뭐지? 싶었는데 역시나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고 수업에는 각각 18명씩 출석. 마지막 날에 몇 명이나 살아남으려나 모르겠다. 기관장은 오전반 수업에는 직접, 오후반 수업에는 카쌤을 보내 뭔가 코스 및 내 소개를 해주었다. 기관장 수쌤... 내년에 세마나 코레아나를 하자고 벌써 밑밥을 깔고 있는데 흑흑 나그에게 질풍같은 용기를 거친 파도에도 굴하지 않게... 여튼 코스를 시작해서 좋다. 나이차가 나는, 서로 다른 관심사를 가진 학습자들에게 어떻게 지속적인 동기부여를 할 수 있을지 고민이긴 하지만 그래서 재밌다. 다들 정식 학과 수업으로 한국어 수업의 첫 단추를 꿰게 되어 다행이라고 했지만 사실 처음부터 관광학과 수업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짜여진 수업 스케줄을 개강 며칠 전에 비집고 들어가는 것도 부담스러웠고, 별 관심 없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 수업을 하는게 장티푸스 뭔 의미일까 계속 생각했다.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버전의 나라면 아 그래도 그들에게 뭔가 새로운 자극을 줄 수 있다는 데 의미가 있지 하하 내일의 태양이 뜬다 호호 이 지랄을 하겠지만 나는 지금 아래로는 꿀럭꿀럭 머리는 쪼개질 것 같지 배에 가스가 차서 아래위로 시도 때도 없이 분출 중이라. 그나저나 마지막이 제일 의문인데 일요일에는 스팸 반통에 양파 볶음, (거의 단원 쌤의 친정처럼 생각되는 집의)닭 수프, 오늘은 우유에 불린 오트밀 반컵에 오렌지 두 개만 먹었기 때문이다. 다이어트는 장티푸스 아니고 속이 계속 불편해서. 하여간 마음 속에 이런 생각이 있어서일까, 핑계로는 계속 연이어 있던 휴일 탓을 하고 싶지만, 여하튼 호관과 수업은 매우 더디게 진행 중이다. 메아 막시마 쿨파. 한국인 단원들이 있는게 학습자들에게 플러스 요소일지 마이너스요소일지 잘 모르겠다. 모국어 구사자들은 외국인들이 제한된 문형으로 한국어를 배운다는 게 좀 낯서니까, 자꾸 플러스 알파를 껴서 얘기하게 되는데, 흠.. 타이레놀이 없다. 머리가 아프다. 코디님에게 약을 부탁드렸다. 내일은 좀 나아지겠지. . 매일 조금이라도 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