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의 방랑기/아디오스, 니카라과
현지교육 51-52일차
테오∞
2017. 10. 6. 11:36
05/10/2017~06/10/2017
목요일 아침부터 비가 심상치 않게 왔다. 선생님이랑 발표 준비를 하려면 노트북을 가져가야 하는데 평소에 들고 다니던 장바구니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될 것 같아 짐 한참 뒤졌다. 영월에서 지급 받은 긴 소매 바람막이와 코이카 배낭(+레인커버)으로 완전 무장하고 학원에 갔다. 선생님들을 위해 쉬는 시간을 조금씩 줄여서 수업을 일찍 끝냈다. 학원 선생님들은 거의 버스를 두 번 이상 갈아타야 하는 그라나다 근교에서 살고 있는데, 비가 많이 오면 집에 가는 일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모처럼 일찍 끝나서 룰루랄라 집으로 돌아갔는데 집 안이 온통 어두웠다. 정전이었다. 어둠 속의 대화 저리가게 어두웠다. 모처럼 별이 많이 보일까 했는데 구름이 많이 껴서 거의 보이지 않았다. 오늘 하숙집 저녁 메뉴는 닭국. 닭을 좋아하는 J쌤도 모처럼 함께 식사 했다. 촛불을 켜고 밥을 먹었다. 바람이 많이 불어 촛불이 자꾸 꺼졌다. 나름 로맨틱한 시간이었다.
방에 돌아와서 다시 짐을 뒤졌다. 병태가 지리산 갔을 때 샀던 헤드랜턴을 쓰고 숙제를 했다. 발표 대본을 수정해야 하는데 노트북이 방전되어 켜지지 않았다. 전기가 안 들어오니 당연히 인터넷 라우터도 끊긴 상황. 할 일이 없어 그냥 일찍 누웠다. 선잠 들었다가 몇 시간 지나서 깨보니 정전이 끝나있었다.
오늘 학원에 갈 때 핸드폰 충전기를 챙겨갔다. 나도 선생님들도 유용하게 썼다. 잠깐 정전이었던 그라나다와는 달리 근교는 계속 정전이라고 한다. 거기에 선생님들 집은 지붕이 무너지고 난리가 났단다. 심지어 J쌤네 선생님은 결근했다. 핸드폰도 배터리가 다 되었는지 연락도 닿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J쌤과 같이 나란히 앉아 수업을 들었다. J썜은 내일이 당장 시험인데 담당 선생님이 안 나왔다고 조금 난감해했지만 나는 다른 사람이랑 같이 수업을 들어 좋았다. L쌤을 무척 좋아하지만 잘 되지도 않는 에스빠뇰로 끝없이 얘기하는 일은 사실 좀 벅찼기 때문이다.
학원 옆 빵집에서 시나몬롤을 사서 점심을 먹었다. 두 개의 심장에 갈 시간이 없었다. 길에 나무가 쓰러지고 난리가 났다고 오늘 수업도 일찍 끝내야 했기 때문이다. 거의 3시쯤 끝났다. 다른 동기쌤들과 대성당 근처 문방구에 가기로 했다. 평일에는 수업이 5시에 끝나서 도저히 영업 시간에 맞춰 갈 수 없었던 곳이다. 슬렁슬렁 길을 걷는데 길에서 노는 아이들이 많이 보였다. 어제 오늘 비가 많이 와서 초등학교에 휴교령이 내렸다고 한다. 휴교 때문인지 우리가 평소에 집에 돌아가던 것처럼 늦은 오후가 아니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평상시와는 퍽 다른 거리 풍경이 생소했다.
경비원이 락커에 짐을 넣으라고 해서 고분고분 가방을 넣고 문방구를 구경했다. 학원 선생님들을 보는건 내일이 마지막이기 때문에 뭔가 카드라도 살까 했는데 마음에 드는 카드가 없었다. 그 와중에 문방구(겸 팬시점) 직원 한 명이 영어를 연습하고 싶었는지 계속 말을 걸었다. 사실 좀 번거로웠지만 최대한 상냥하게 대꾸해주었다. 그녀가 추천해 준 것들은 다른 쌤들의 만류로 사지 않았지만 뭐. 하여간 카드는 그냥 자체 제작하기로 했다. 문방구를 나올 때도 경비원이 영수증 검사를 했다. 보통 다른 사람들이 검사 받는 것만 봤는데 새로운 경험이었다.
다른 쌤들이 가죽공방에 간다고 같이 가겠냐고 물었다. 내일이 마지막 시험이니 나름 준비를 해야 될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라나다에 있을 날도(+동기쌤들이랑 같이 있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에라 모르겠다하고 쌤들을 쭐래쭐래 따라갔다. 그라나다 대성당 뒤로 무지개가 걸려있었다.
대성당을 지나면 행인들의 평균 신장이 훌쩍 커진다. 외국인 관광객들로 늘 북적이는 그라나다 관광의 중심지라 그런지 이 구역의 물가는 한국과 거의 비슷하다. 식당 등 가게들은 손님을 끌려고 열심이다. 매일 학원-하숙집만 왔다갔다하던 나에게는 생소한 풍경이었다. 덩달아 관광객 모드가 되어 흥미진진하게 구경했다. F쌤을 따라 들어간 가게에서 혹시 몰라(내가 쓰던 누구에게 선물을 하던) 열쇠고리 두 개를 사고 나왔다. L쌤과 가게 밖 벤치에 앉아 L쌤이 학원의 M선생님과 나눈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커플이 L쌤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갈 때에 맞춰 사진을 찍어달라는 거다. 설정샷 욕심은 어디나 비슷하구나 싶어서 재미있었다.
동기쌤들과 근처 빵집 겸 까페에서 요기를 하고 내일을 위해(시험 끝난 뒤 지역문화탐방 시간) 현금도 좀 뽑고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시험 공부는 뒷전으로 하고 학원 선생님에게 전할 카드를 만들었다. 끝내놓고 보니 좀 유치하긴 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만들었다는데 의의를 둔다. (감사합니다의 합은 hab으로 쓸지 ham으로 쓸지 고민하다가 그냥 jab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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