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교육 36일 차, OJT 3일 차
9월 21일 수요일 3일차
기관에 출근할 때, 점심먹으러 하숙집에 올 때 다 택시를 탔다. 처음에는 의욕이 넘처서 걷기 시작했으나... 장렬하게 길을 잃고 지각할까봐 그냥 탔다. 점심 전에는 역시나 K와 수업 협의를 하고, 막간을 이용해서 태권도 팀에 방문했다.
사범님은 니카라궨세. 파렘 에스뗄리 팀은 성적도 좋고, 이제 대학컵 대회를 준비 중이라고 한다. 이들에게 태권도는 어떤 의미일까 궁금했다(종주국에서 온 나는 태권도보다는 유도를 좋아한다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아, 훈련 용어가 한국어인게 흥미로웠다. 차렷, 경례 등.. 하긴 뭐 펜싱 용어 같은 것도 죄다 프랑스어고 유도도 한국 외에서는 다 란도리며 뭐며 일본어를 그대로 가져다 쓰고 있으니 당연한 거긴 한데 좀 신선했다. 그나저나 타일 바닥에서 연습하는 모습은 좀 헉스러웠다. K에게 여기는 한국어단원이 아니라 태권도 단원이 필요한 거 아니냐고 농을 섞어 말했다. 사범님이 내게 태권도 경험이 있냐고 물어서 꽌도 에라 니냐일 때 잠깐 해본 적 있다고 대답하니 '품새(한국어로)' 어떤 걸 배웠냐고 한다. 태극 1, 2장이라고 하니 끄덕끄덕한다. 시범을 보이라고 할까봐 조금 긴장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단체사진을 찍고 만남을 마쳤다. 선수 한 명이 셀피를 부탁해 같이 찍기도 했다.
오후에는 박물관에 가기로 했는데 비가 많이 와서 오후 일정은 취소되었다. 5시에 선임단원 D 선생님 집에서 식사하기 전에 시간이 비어서 결과 보고서를 미리 조금씩 쓰고 있는데,
갑자기 컴퓨터 전원 케이블이 먹통이 되어 충전이 되지 않았다. 간당간당 버티던 컴퓨터도 결국 꺼졌다. 이거 없으면 일을 아예 못 하니까 덜컹했다. 잔뜩 긴장하고 핸드폰으로 주변 컴퓨터 상점을 검색했다. 다행히 센트럴 근처에 상점이 있었다. 제대로 작동 되나 안 되나 확인해야 하니까 노트북도 아예 챙겨들고 밖으로 나섰다. 쓰리 당하면 어쩌지 조금 걱정 되었지만 확실한 게 좋으니까. 여튼 가는 길에 원래 가려고한 가게 말고 다른 가게를 발견했다. 어쩔까하다가 그냥 들어갔다. 말이 안 되니 그냥 노트북을 꺼내들고 케이블 달라고 했다. 아저씨가 척하면 척, 케이블을 끼우더니 노트북이 작동하는 걸 확인해주었다. 거금을 내고(깎아 달라고 할 정신이 없었음) 케이블을 챙겨 한참을 헤메다가 구글맵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센트럴에 도착했다.
센트럴 옆 라 꼴로니아에서 일요일에 캘리포니아롤을 만들기 위해 간장과 와사비를 샀다. 아시아 소스가 모여있는 코너에서 뭘 사나 고민하고 있으려니 직원이 말을 걸었는데 중국사람 아니라서 모른다고 하고 내뺐다. 그러고보니 김을 사야했는데 까 먹었네. 내일 다시 가야겠다. D선생님네 방문선물로 드릴 초콜렛과 파운드 케익을 들고 통로를 휘젓고 다니다가 에스뗄리에 온지 3일만에 동양인을 마주쳤다! D선생님의 동기인 S선생님이었다. 길 찾을 걱정을 덜고 같이 D선생님네로 갔다.
D선생님네는 내가 거주지 후보로 두었던 곳들 중의 하나다. 아파르트멘또(여기는 고층건물이 아니어도 집단?거주지는 다 아파트라고 함)로 온수가 나오는 욕실에 작은 냉장고, 화구 2개짜리 가스렌지와 개수대, 널찍한 식탁이 딸린 실용적인 집이다. 이 집이 좋을까 지금 하숙집이 나을까 고민이다. 어차피 방세는 사무소에서 지원 되고, 공과금 및 생활비를 다 따져 보았을 때(그리고 안전과 환경과 스페인어 사용 여건 등) 각각 다 장단점이 뚜렷해서 더 선택하기가 어렵다. 하여간 오늘은 D쌤이 만들어주신 귀한 수제비와 김밥으로 포식했다. 비가 오는 날씨와 칼칼한 수제비는 완벽한 궁합이었다. 당근을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하니 당근 빼고 햄을 잔뜩 넣어 만들어 주신 김밥도 맛났다. 다행히 혹시 몰라 두 개 챙겨간 한국기념품을 D, S 선생님에게 드리고 혜진에게 보여주기 위해 집 동영상을 찍었다. 초면...은 아니고 두번째로 본 사이에 죄송했지만 혜진의 고견이 네쎄싸리오해서 어쩔 수 없었다.
S쌤네 집으로 가서 또 집구경을 했다. 촛불이 켜진 방 안이 아늑했다. S쌤은 기관 관계자 집의 독채에서 홈스테이를 하는데, 개별 주방(?)이 있어서 편리하다고 했다. 방은 작았지만 욕실(온수X)도 있고 선반도 딸려 있어 공간 활용에 유용해 보였다. 책이 엄청 많아서 놀랐다. 몇 권은 선생님 책이고 몇 권은 사무소 책이라고 한다. 박노해 시집 한 권과 각종 한국 과자와 기념품을 건네 받고 영화관이 있는 쇼핑몰인 물티쿨트로의 카페에 가서 음료수를 얻어마셨다. D선생님은 먼저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반팔을 입고 나왔더니 에어콘을 켠 실내가 무척 춥게 느껴졌다. 파견 말이라 활동 마무리하랴 짐 정리하랴 바쁜 와중에도 부러 시간을 내서 나에게 이것 저것 알려주려고 하는 선임 선생님들이 무척 고마웠다.
우리가 딱 건물을 나섰을 때 잠깐 정전이 되더니 다시 가로등이 켜졌다. D쌤과 함께 택시를 타고 집에 가는 데 내가 집 주소를 잘 몰라서 택시를 두 번 탔다. 처음에는 강을 건너서 파렘 근처까지 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택시를 타고 겨우겨우 집에 돌아왔다. D쌤이 없었으면 완전히 패닉이었을 거다. 덩달아 달밤에 산책하게 된 D쌤에게 미안하고 감사했다. D쌤이 돌아가서 당장 맵미(오프라인 상태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지도 어플. 해당 지역 지도를 미리 다운 받아 두어야 함)를 깔라고 추천해주었다. 들어와서 식탁에 하숙집 식구들 먹으라고 한국과자들을 올려두고 방으로 올라왔다. 지금 맵미를 설치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