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텔리 192일 차 / 니카라과 248일 차
-20/04/18
# 아이들
"muñeca valiente" 에텔이 퇴원했다. 매일 삐약거리던 에텔은 퍽 조용해졌는데, 그래도 눈에는 여전히 장난기가 그득하다. 문제는 에텔과 디아나의 오빠인 일리아스다. 열두살인 일리를 생각하면 딱 두 장면만 떠오른다. 하나. OJT 때 마마가 죽어 엉엉울던 일리, 둘. 수업 전에 시험작으로 만든 비빔밥을 좋아해준 일리. 여튼 그 애는 아줌마네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데, 에텔이 입원하고 난 다음 날 심한 두통으로 입원했었다. 엊그제 카티와 함께 정밀 검사를 받으러 마나과로 내려갔다. 카티는 오늘 돌아왔다. 혼자 돌아왔는지, 일리도 돌아와 자기 집에 가 있는지는 묻지 못했다.
평온한
날들
아넥사 벽화들 중
# 휴강휴강휴강시위
월요일 수업 때부터 밖이 시끌시끌했다. 내가 수업하는 강의실 바로 앞이 정문이라 뭔일이나 행사가 있으면 늘상 있는 일이라 그런가 보다-했는데 학생 시위란다. 역시나 연례 행사처럼 어쩐지 슬렁슬렁인 분위기였다. 매년 하는 등투 같은 느낌. 학생회가 어찌나 좋은 스피커를 틀어놓았는지, 문을 닫고 있어도 강의실이 웅웅 울렸다. 가뜩이나 까불거리는 오후2반인데 애들 말마저 잘 안들려서 수업 막판에는 거의 소리지르다시피 주절거리고 수업을 마쳤다. 화요일에는 수업 시작 전부터 정문 근처가 왁짜지껄했다. 정문도 봉쇄. 도저히 수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갈 사람은 가라고 하고 남은 사람들과 엉망진창인 자막의 부산행을 봤다. 자막이 어느 정도였냐, 게으른 내가 시간나면 뜯어 고쳐야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 그래도 다들 집중하고 막판에는 모두가 폭풍 오열했다.
수요일에 눈을 뜨니 8시였다. 세상에. 샤워고 뭐고 양치도 안 하고 옷만 주워입고 뛰쳐나갔는데 1층에서 벨렌(하숙생1)이 뭐라뭐라 말했다. 뇌가 부팅 중이라 어영부영 끄덕거리고 근데 난 간다, 점심도 (집에서)안 먹을거야하고 집을 나섰다. 순간 학생이 보낸 메일을 확인했는데 오늘 수업하냐는 질문. 의아해서 구멍가게에서 폰 잔액을 충전하고 후교수한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전체 휴강 맞다는 말에 지각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모처럼 생긴 휴일을 만끽하는데 살사반 왓츠앱이 폭발했다. 다들 사진이며 동영상을 퍼다 날랐다. 레온과 마나과의 우까UCA에서 난리가 났다고들 했다. 페이스북에 들어가보니 연금법 개혁과 관련해 반대하는 시위대를 찬성파+여당 지지자 JS들이 공격했다는 기사가 우수수 떠 있었다. 다친 사람이 여럿 있다고 했다.
목요일. 학교에 갔다. 조용했다. 10시 쯤 밖이 시끌시끌하길래 나가보니 학생들 한 무리가 삐뚤빼뚤한 손팻말을 들고 후문에서 정문으로 행진 중이었다. 이번 학기 수업에는 정외과 학생(특히 새내기들)들이 많은데, 그래서인지 낯익은 얼굴들이 많았다. 맨 뒤에서 핸드폰으로 촬영하고 있는 꺽다리 르네와 눈이 마주쳐 손을 흔들어주었다. 학생들은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깔깔거리며 어설픈 구호를 외쳤다. 형제의 피 어쩌구가 써있는 플래카드를 보니 4.19 혁명 사진이 기억났다. 스크럼을 짠 수송초등학교 꼬마-할아버지들.
생각보다 분위기가 심각하지 않아 안심하고 사무실로 다시 들어갔다. 학생들의 구호며 노래 소리를 들으며 캘리그라피 대회 투표이미지를 만들고 있는데 이번에는 빵빵거리고 부릉거리는 소리로 시끄러워졌다. 또 나가보니 어떻게 알았는지, 여당 지지자들이 우르르 차며 오토바이를 끌고 몰려와 학교 앞 도로를 서행하고 있었다. 학생들의 구호를 집어삼키려고. 아이들은 고래고래 악을 쓰며 구호를 외치고, 차들은 빵빵거리고, 학교 철창 안과 밖의 구경꾼들은 다들 핸드폰을 들어올리고, 얘기를 하려해도 잘 안 들려 서로 소리소리를 지르고. 어디서 데려왔는지 타악기를 들고 교복을 입은 세쿤다리아 학생들을 태운 트럭도 이 혼란에 한 몫 했다. (나중에 기사를 보니 정부가 청소년들을 강제 동원했다고 함). 양 진영 모두 서로 약간 간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지켜보면서 울컥울컥하고 조마조마한게, 분위기는 점차 날이 섰다. 일촉즉발. 누군가 돌발행동을 했다면 분명 겉잡을 수 없이 폭발했을 것 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없었다.
그 와중에 후교수에게 오늘 수업이 가능할지 물었더니 일단 기다려보라고 했다. 곧 교수들은 긴급회의라며 모였다. 같은 방 선생님들이 다 나간 사무실에서 타자를 쳤다. 돌아온 선생님들은, 3시에 개혁 찬성 행진을 하게 되었다고 전해주었다. 국립대다보니 정부 여당과 다른 의견 내는 게 힘들 거라는 건 이해한다만, 차라리 그냥 가마니가 되던가. 여튼 정치활동이 금지되어있는 나는 휴강 공지를 올리고 털레털레 집에 오는 버스에 올랐다. 사람들이 모여있겠거니 싶어 중앙 공원에 내렸는데 생각보다 썰렁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중앙 광장이 아니라 도밍고 광장에서 시위가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보내준 영상을 보니 웬 미친놈이 발포도 했더라. 여하간 일찌감치 내린 김에 예루살렘에서 슈와마를 먹고 키스미에서 아이스크림을 아작 낸 다음 집으로 돌아와 또 밥을 먹었다. 뭔가 불안했다. 계속 속을 꾸역꾸역 채워넣고 싶었다. 로스끼야를 한 봉지 사와서 먹었다. 해질 때 쯤 거리도 조용해졌다. 살사 채팅방 사람들은 최루가스를 막기 위한 마스크 만들기, 인터넷 차단시 쓸 수 있는 메신저 어플 등등의 정보를 공유하면서 내 불안감을 가중시켰는데 정작 오늘 춤 수업은 예정대로 진행된다고 했다. 고민하다가 씻고 쭐래쭐래 수업에 다녀왔다.
나를 불안하게 한 짤들
오늘 뭐 어디 챔피언이 와서 특강해줌
일찍 돌아와서 페이스북을 계속 새로고침하면서 캘리 대회 이미지를 마저 만들었다. 접수 마지막 날이라고 다들 급하게 우르르 메일을 보내서 하나하나 읽고 답장하고 저장하고 파일을 정리하느라 조금 귀찮았다. 업로드를 마치고 누워서 뒤척뒤척, 또 페이스북을 뒤졌다. +7월 말부터 독거단원에서 벗어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야호. 간밤에는 3명이 죽었다. 두 명의 학생. 경찰 한 명.
8시 쯤 일어나서 어영부영 돌아다니다 과장님 연락을 받았다. 연금법 개혁 찬반을 넘어 아예 친정부vs반정부 세력 구도로 진행 중이라고. 시위가 폭동으로 변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 밤 사이 몇 몇 지역에서는 혼란을 틈탄 약탈도 성행했다고. 행여나 구경을 핑계로 시위대 근처에서 어정거리지 말라는 귀신같은 당부에 좀 찔렸다. 오후 3시에 에스텔리에서 큰 시위가 예정되어 있는데, 거기 나가볼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현지인들에게는 심각한 사태를 어느 정도 먼 발치에서 관망하고 있기가 좀 찝찝해서. 그래도 안전 최우선이라는 말에 깨갱하고 조신하고 얌전하게 집에 있기로 마음먹었다.
거진 한나절이 남아있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
* 학교는 공식적으로 다음 주 월요일가지 학사행정을 중단한다는 공지를 올렸다. 위선자라며 비난하는 댓글이 달리면 글을 아예 지웠다가 새로 올리기를 반복하고 있다.
** 학생회가 학교를 점거했다고 한다. INSS 관련이라기 보다는 학생 파업의 일환으로 보인다.